고성의 문화와 역사

先史신석기시대:고성군에 인접한 통영군의 남쪽해안 도서지방의 패총유적과, 사천시 늑도유적, 하동군 목도리 패총유적, 진주 남강유적 등지에서 발굴된 신석기 시대 유적의 예에서 미루어 보아 고성지방에도 이 시기 이미 인간활동이 이루어 졌던 것으로 예상할수 있으나 아직 확인된 것은 없다.
三韓청동기시대: 고성군 일대의 청동기시대 유적은 고성군 전역에 분포하고 있는 고인돌(支石墓 )유적과 취락(聚落)유적지가 확인된바 있고, 마제석검(磨製石劍)등이 출토 수습된바 있어 오늘날 고성군민의 기초는 이때부터 농경정착 생활을 하면서 주민생활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고 할수 있다.
초기철기시대:고성의 고대 국명에 관한 최초의 문헌은 3세기경 중국 진(晉)나라 진수(陳壽)가 저술한『삼국지(三國志)』의 “위서동이전(緯書東夷傳)”에 변한(弁韓) 12국 중의한나라인「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이라는 기록이 최초의 고성의 국명이다. 이와 같이 문헌에 나타난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은 하일면 송천리 석관묘(石棺墓)와 고성읍 동외동 패총(東外洞 貝塚) 송학리 패총 유적을 퇴적시킨 사람들이 중심이 되었다고 생각되며, 벼농사를 짓고 철(鐵)을 제련(製鍊)하면서 풍족한 생활을 유지하고 인접한 일본(日本)과 중국(中國)과도교류하는등 상당한 수준의 국가형태(國家形態)를 이루었던 단계이다『삼국사기(三國史記)』나『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신라(新羅) 내해왕(奈解王)대 (A.D 3세기초)에 고사포(古史浦), 또는 고자국(古自國)등이 중심이 되어 해안지방의 여덟 개 소국들과 모의하여 아라(阿羅)또는 가라(加羅)국을 침략하는 소위 포상팔국(浦上八國) 의 전쟁이 일어났다고하며 이 포상8국중의 한 나라
42년:『삼국유사(三國遺事)』의 5가야조(五伽耶條)에 의하면고성(固城)은 5가야(五伽耶) 중의 하나인「소가야국(小伽耶國)」이라 하였다.『삼국유사(三國遺事)』「가락국기(駕洛國記)」에 의하면 후한광무제 건무 18년임인(後漢光武帝建武18年壬寅) 즉 A.D 42년에 6가야(六伽耶)가 같은 시기에 건국되었다고 한다. 소가야(小伽耶)도 이 무렵에 건국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562년:고성읍의 송학동 고분군과 동해면 내산리 고분군등은 5세기말, 6세기초에 백제,신라,왜와의 활발한 교류를 가지면서 독특한 문화를 형성한 유적으로 발굴 조사된바 있으며, 이 무렵가지가야 여러나라 와, 대등한 국가로 존속되어 오다가 가야(伽耶)의 여러나라 중에서 금관가야(金官伽耶)는 532년 신라에 의해 멸망하고 고령의 대가야(大伽耶)도 562년에 신라에 의해 멸망되었으며이 무렵 소가야(小伽耶)또는 고자국(古自國)은 신라에 병합되었다고 보고 있다.
685년:신라(新羅)가 삼국을 통일하고 난 후 신문왕(神文王) 5년(685년)에 전국을 9주(九州)로 정비하였다 주(州) 밑에는 군(郡).현(縣)을 두었으며 고성(固城)은 9주(九州)중에서도 청주(菁州 : 지금의 晉州) 산하 11개군(郡)중에 속하였고,「고자군(古自郡)」이 되었다.
757년:신라 35대 경덕왕(景德王) 16년(757년) 청주(菁州)는 그 이름을 강주(康州)로 고치고, 고자군(古自郡)을「고성군(固城郡)」으로 개칭하였으며 영현(領縣)이 셋인데 문화량현(蚊火良縣 : 지금 자세히 알수 없다), 사수현(泗水縣 : 본래 사물현(史勿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는데